헬무트 슈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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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연방공화국의 제5대 총리. 1974년부터 1982년까지 약 8년간 재임했다.
2. 생애
2.1. 유년기
1918년 12월 23일 독일의 함부르크에서 부모가 모두 교사인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유대인 은행가의 사생아 출신이었다.[1] 반유대주의의 광풍이 곳곳에서 몰아치던 이 시기, 당연히 그의 이런 가정 배경은 그의 가족들만이 아는 비밀로 오랜 시간 동안 묻혀 있었다.[2] 슈미트의 회고에 따르면 자신에게 유대인의 혈통이 흐른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무렵은 10살 무렵이었다고 한다.[3] 그리고 이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슈미트는 자신이 진정한 나치[4] 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나치에 대한 반감을 갖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것이 알려지게 된 것은 그가 헬무트 콜이 주도한 내각불신임결의를 맞고 총리직에서 물러난 뒤인 1982년으로, 그와 단순히 정치적 동반자 관계를 넘어서 친구관계로 평생 우정을 나눈 프랑스의 대통령 지스카르 데스탱[5] 이 밝혀서 알려지게 된 것이다.
2.2. 군복무
2차 대전 발발 당시 슈미트는 21세였고 당연히 징집된다. 초기에는 브레멘 지역에서 대공 근무를 맡다가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레닌그라드 포위전을 비롯한 동부전선 초창기의 몇몇 전투에 참가한다. 이후 독일로 귀환한 슈미트는 재정부 및 법무부[6] 에서 근무하다 1944년 12월 루프트바페의 일원으로 벌지 전투의 서막을 장식한 독일군의 아르덴 공습에도 참가한다. 이 때의 공로로 철십자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미 심하게 기울어진 전세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던 것은 없었고 1945년 4월, 그는 뤼네부르크에서 영국군의 포로로 잡혔다가 같은 해 8월 석방된다. 최종계급은 중위. 1958년, 독일 연방군 예비역 대위로 진급하였다.
2.3. 정치입문
종전 후 고향인 함부르크로 돌아온 슈미트는 함부르크 대학교에서 법학, 경제학과 국제정치학을 공부하였다.[7] 그리고 1949년 경제학으로 디플롬(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러는 한편으로 슈미트는 1945년 사민당에 가입하였다. 이 시기 슈미트는 함부르크 시 정부의 경제부서에서 근무를 하였고, 이 시절에 얻은 인기를 바탕으로 1953년부터 연방의회 하원에 진출하였다.
1961년부터는 함부르크시정회로 자리를 옮겨, 함부르크시청에서 제2인자인 내부참사관(Innensenator)으로 일하였다. 1962년 2월 16일과 17일에 엘베강 대홍수가 일어났을 때에는, 월권이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재난대책을 진두지휘하고 경찰과 군병력을 신속히 투입하여 함부르크시의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였다. 칼같이 정확하고 딱부러진 일처리, 그리고 냉철한 판단력으로 인해 그는 이때부터 전국적인 명성을 누리게 되었다. 1963년에는 독일 내 수구반공세력들에게 내란음모자로 누명을 뒤집어쓰는 등 곤욕을 치렀으나, 1965년에 무혐의로 수사가 종결되었다.
1965년에는 다시 연방 하원 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후 행정경험과 탁월한 정치 감각을 바탕으로 사민당의 브레인으로 활동하던 슈미트는 1968년부터 연방사민당의 부의장직을 맡기 시작했다.[8] 그리고 1969년 빌리 브란트가 총리로 취임하자 '당연히' 내각에 입각하였다. 빌리 브란트 정권 초기 국방부 장관으로 활동하던 그는 이후 재정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겨서 브란트를 보좌하였다.
2.4. 총리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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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빌리 브란트는 슈타지의 요원이 간첩임무를 맡고 자신의 비서로 활동한 것이 적발된 귄터 기욤 사건과 음주 섹스 스캔들에 대한 책임을 지고 총리직을 사임했다. 이미 사민당 수뇌부는 심각하게 이미지가 실추된 브란트로는 다음 선거에서 승리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차기 총리로 슈미트를 내정한 상태였다. 결국 브란트가 사민당 내부의 사임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사퇴하자 브란트의 뒤를 이어 슈미트가 서독의 총리 자리에 오른다.[9]
그가 총리 자리에 취임했을 때 서독은 여러모로 위기에 처해있었다. 사회적으로는 68 혁명 이후 온건파와 분리된 강경 학생 운동 세력들이 적군파가 되어서 사회 주요 인사들에 대한 납치 및 암살과 테러를 자행하였고, 외부적으로는 석유파동으로 인해 물가와 실업률이 동시에 상승하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독일 경제를 강타했다. 게다가 귄터 기욤 사건이 발생하자 야당 기민당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매카시즘적인 공세를 사민당에게 퍼붓기 시작했다. 이런 절체절명의 당 위기 상황에서 총리 자리에 오른 슈미트는 좌우파 이념을 초월해 각각의 문제들을 각개격파해가는 방식으로 차근차근히 일을 진행시킨다.
총리 취임 직후 수감중인 테러리스트들의 석방을 조건으로 행해진 야당 정치인의 납치에 굴복한 이후, 독일 내부에서는 각종 납치와 테러 사건이 연이어 벌어지기 시작한다. 이에 교훈을 얻은 슈미트 내각은 "'''테러리스트와는 협상하지 않는다."'''라는 것을 기본 기조로 내세우며 일괄적인 강경대응을 펼쳐나간다. 이 중에서도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바로 1977년 소말리아에서 테러리스트들이 루프트한자의 민항기를 납치하자 특공대를 파견해서 민간인 피해없이 테러리스트들을 모조리 쓸어버린 사건. 1972년 뮌헨 올림픽 참사에서 엉성히 대응하다가 최악의 결과를 빚어냈던 불과 6년전 독일 특공대의 모습과 비교하자면 말 그대로 격세지감. 진압작전의 성공 이후 안도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던 슈미트는 후일 진압작전이 잘못됐을 경우 총리직에서 물러날 각오를 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한편, 이 시기 가장 유명한 케인즈주의 신봉자 중 하나였던 슈미트는 취임 초기 자신의 신념에 맞추어 적극적인 확장정책을 실시하여 실업율을 낮추려고 노력하는 한편으로 , 변동환율제 실시와 적극적인 수출장려를 통해 물가상승에도 제동을 걸고자 하였다.
외교적으로도 능수능란함을 빛을 발휘해서, 1975년 그는 "거주지 변동의 자유, 의사소통의 자유, 인권 보장"을 내세우면서 소련으로 하여금 헬싱키 협약에 서명하게 했고, 이는 이후 1980년대 말 동구권의 붕괴에 일익을 담당했다고 평가받는다. 또한 빌리 브란트의 동방 정책도 계승하면서 동독과 서독 사이의 교류는 계속해서 늘어만 갔다.
2차대전 시절 장교 복무, 1970년대 초 국방장관을 역임했던 경험을 살려 국방 부문에서도 상당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1972년 미·중 간의 교류로 데탕트 분위기가 조성되자 서독은 동독과 군축협상에 들어갔는데, 1976년 베트남 통일을 시작으로 인도차이나 반도가 공산화하면서 다시 냉전의 기운이 유럽을 덮었다. 이때 소련은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일원인 동독에 핵탄두를 탑재한 SS-20 중거리 지대지미사일을 배치했다. 이 탄도미사일은 서독을 비롯한 서유럽 전체를 공격할 수 있는 무기였고, 당시 유럽에는 이에 대항할 만한 핵무기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10]
물론 소련이 실제로 서유럽에서 핵전쟁을 벌이기는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SS-20의 동독 배치가 당시에 가졌던 상징적 의미는 매우 컸다. 이는 유럽의 군사적 힘의 균형이 사회주의 공산권으로 쏠림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그때쯤 갈수록 의석수를 늘리며 기염을 토해가고 있던 프랑스, 이태리의 공산당세력, 서독 사민당 내의 좌파세력을 고무시키는 것이기도 하였다.[11] 소련에 대한 미국의 외교협상을 믿어볼 수도 있었지만, 1970년대에 미소가 추진했던 전략무기 제한협정 등의 핵무기 군축은 주로 ICBM처럼 미국과 소련 영토를 직접 공격할 정도의 장거리 무기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따라서 SS-20과 같은 중거리 핵전력은 소련이 미국과의 군축협상에 영향 받지 않고, 서유럽에서의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는 유효한 수단이 될 수 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소련의 도발에 대해 미국은 방법을 찾지 못하고 그저 난감해 하고만 있었는데, 헬무트 슈미트는 이러한 도발에 맞서기 위한 NATO 차원의 대응전력 배치를 적극적으로 공론화하며 미국에 압력을 가했다. 그리고 1977년 9월 그 유명한 '런던 연설'을 통하여 소련이 동독에서 SS-20 미사일을 철수시키지 않을 경우,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 회원국인 서독 역시 미국의 중거리 핵미사일 퍼싱-2를 자국에 설치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물론 소련이 동독에서 SS-20 미사일을 철수시킨다면 퍼싱-2의 서독 배치도 필요 없는 것이었고, 서독정부는 이를 위해 최대한 노력한다는 단서도 붙어 있었다. 어쨌든 이로써 SS-20 미사일에 관한 외교적 협상의 주도권은 미국-소련에서 서독-소련으로 넘어왔으며, 미국과 소련이 진행하던 중거리핵전력협정(INF)과 관련한 협상은 중단되었다.
물론 서독에서는 퍼싱-2 배치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고, '소련-동독이 설마 핵전쟁을 일으키겠냐?' '미제국주의 호전광의 꼭두각시가 되겠다는 거냐?' '어차피 우리가 대응하지 않아도 걔네는 그냥 철수시킬 거다' 등의 비판이 제기되었다. 심지어 일부 사회주의 계열 운동권 학생들은 헬무트 슈미트의 암살을 공공연히 협박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슈미트 정권은 이러한 결정이 안보와 관련된 것이라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불행히도 SS-20 미사일을 철수시키라는 서독의 요구에 소련은 응하지 않았고, 그 결과 1984년 서독에는 퍼싱-2 미사일이 결국 배치되고 말았다.[12] 그런데 이때쯤 미국 대통령 레이건의 대소련 강경 노선이 펼쳐지고, 미국의 군비증강이 이루어져, 유럽 내에는 반전, 반핵 여론이 불 붙기 시작하였다.[13]
어쨌든 극좌파들의 테러행위에 대한 성공적 진압과 국제 외교안보 분야에서 보여준 세계적 리더십 등을 바탕으로 슈미트는 1976년과 1980년의 총선에서 연이어 승리, 집권에 성공하였다. 특히 1976년 총선에서는 1975년에 서독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하는 등 경제분야에서 최악의 성적을 보이고 있어서[14] 기록적 참패가 예상되었으나, 절체절명의 TV 토론에서 특유의 냉철함과 명민함으로 상대를 압도하여 순전히 헬무트 슈미트의 개인기로 신승을 거둘 수 있었다.[15] 그리고 1980년의 총선에서는 헬무트 슈미트를 반대하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연일 계속되고 사민당의 지지율도 지극히 저조한 가운데 선거를 치루었지만, 1976~1979년의 독일경제성장률이 괜찮았던 데다가 슈미트 총리에 대한 일반대중들의 지지도가 높았던 데에 힘입어서 생각보다 편하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총선 승리의 뒤에는 사민당의 의석수 감소[16] 와 연정파트너였던 자민당의 의석수 증대[17] 에 따른 자민당과의 알력 심화라는 그림자가 있었다.[18] 여기에 두 선거 다 야당인 기민당이 원내 제 1당이었던 점은 덤.[19]
그리고 이 연정은 1982년 마침내 파국으로 치달았다. 제2차 석유위기와 그간의 확장재정정책으로 서독의 경제성장률이 하락하고[20] 재정적자가 심해지자, 당시 사민당에 대거 진출했던 학생운동권 출신 의원들이 사민당 내 좌파그룹을 형성하며 노조와 연대하여 대대적인 부자증세, 사회간접자본투자확대, 대기업국유화 등 이른바 '체제극복적 개혁(systemüberwindende Reformen)'을 주장하는 등 슈미트 내각을 압박했던 것. 게다가 사민당 의원 대다수는 퍼싱-2 미사일의 서독 배치에 대해서도 무조건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이었다.[21]
물론 슈미트 내각은 이러한 당내 반발에 계속 강경하게 맞섰지만, 당내 좌파그룹의 목소리가 점점 더 거세지자 사민당-자민당 간의 연대는 점점 약화되었으며 자민당도 사민당에 대한 신뢰를 조금씩 거두기 시작했다. 이 틈을 노려 기민련의 총재였던 헬무트 콜은 끊임없이 자민당에게 연립 정부 구성에 대한 러브콜을 날렸다. 자민당은 고민 끝에 사민당과의 연정 이탈 및 기민련-기사련과의 연정 구성에 합의함과 동시에 내각불신임결의안이 연방 하원 의회에 상정되면 찬성하기로 하고 연립정부 내의 자당 소속 각료들도 일단 물러나 당으로 돌아오게 하면서 사민당-자민당의 연정은 결국 붕괴되었다. 그리고 1982년 10월 1일 연방 하원 의회에 상정된 내각불신임결의안이 통과되면서 슈미트는 헬무트 콜에게 총리 자리를 넘겨주고 물러났다.[22]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고,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는 없다. 단지 이렇게 물러나는 것(국민의 지지로 구성된 연정이 정치인 사이의 야합으로 붕괴된 것)이 아쉬울 뿐"이라는 소회를 남기긴 했지만 불신임안 통과 직후 제일 먼저 후임 총리 콜에게 축하의 인사를 남길 만큼 슈미트는 마지막까지 신사였다.[23] 그가 국민들에게 총리로서 보낸 마지막 메시지는 "우리가 모든 일을 그렇게 나쁘게 처리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였다.
2.5. 정계 은퇴 이후
1987년까지 형식적으로 연방하원에 남아있던 슈미트는 이 해를 끝으로 정치를 완전히 떠났고, 이후 언론계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차이트(Zeit)지의 편집장을 맡기도 했다고. 2010년 93세를 넘기면서 콘라트 아데나워가 갖고 있던 독일 총리 '''최장수''' 기록을 경신하였다.
2011년에는 94세인데도 사민당 집회에 참가해서 한 마디 했다.
2015년 9월에 혈전 문제로 수술을 받고 퇴원했는데 2015년 11월 10일, 그의 몸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어 생명이 위독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미 의식이 있는 상태가 드물다고 하며 주치의가 회복불능이라는 단어를 쓸 정도로 심각한 모양. 결국 독일 현지 시각으로 11월 10일 부로 세상을 떠나셨다. 부고. 이에 프랑스의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을 비롯, 각계 유명인사들의 추모사가 잇따랐으며 전 세계에서 애도의 물결이 이어졌다.
독일 현지 시각으로 11월 23일 함부르크에서 장례식이 있었고, 공공기관에서는 조기를 게양하였다.
3. 어록
미래에도 가장 중요한 독일 정치가의 의무는 개인의 존엄성을 최고의 규범으로 삼는 것이다.
타협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민주주의에 쓸모가 없다.
나는 똑똑하다. 나를 제어할 수 있는 참모를 원한다.
국민은 지배하지 않는다. 그러나 민주주의체제에서는 국민이 정부를 비폭력적으로 교체할 수 있다. (...) 경제와 사회 그리고 국가를 점진적으로 개혁하는 것이 민주주의에 적합한 정치적 실천임을 포퍼로부터 배웠다. 급격한 변혁은 시민의 자유를 위협하고 잘못될 경우에는 더 큰 희생을 치러야만 고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고도로 복잡한 산업민주주의 국가는 급격한 변혁에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을 덧붙인다.
나치 시절 체험한 자유에 대한 갈망 때문에 민주주의자가 되었고, 내가 겼었던 동지애나 연대감 혹은 형제애가 필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나는 프로이센의 한자 동맹 도시 함부르크 출신이다. 내 자신이 의무를 다했다고 여기니 만족하며, 다른 사람들이 의무를 다했다고 말해준다면 더 기쁘겠다.
총리직에서 퇴임하면서
4. 동시대인들의 평가
헬무트의 정책 내용보다는 그의 인간됨에 매료되었다. 능력이 공격적 태도와 교묘하게 배합되어 있다. 전문성과 탁월함이 드러난다.
게르하르트 슈뢰더[24]
헬무트 슈미트는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것을 말해야 한다는 유혹을 뿌리쳤다. 그는 오히려 그들에게 약속을 했고 사실을 말해주었다.
페터 슐츠, 함부르크 시장
그는 태어난 지 얼마 안되어 지상에서 이룰 수 있는 완전함에 도달했다. 이후 그는 더 이상 배울 필요도 없었고 다른 모든 사람들을 바보라고 여겼다.
그를 알고 평가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그의 사람됨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그는 강인한 인격과 충성심, 그리고 인간적인 따뜻함의 소유자이다. 인간적인 차원에서 내가 더 신뢰하거나 내게 더 분명한 판단력을 주는 정치인은 없다.
슈미트는 2차대전 당시 장교로 복무하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함부르크 시 내무국장으로 홍수와 싸웠을 떄의 밤이 그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골로 만[26]
곧 50년이 되는 독일연방공화국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슈미트의 총리재직 시절을 특징지어 역사책의 표제로 들어갈 만한 뚜렷한 항목이 없다는 것이 그의 개인적인 비극이다.
페터 필립스, 언론인
5. 여담
- 마도로스 모자를 공적인 자리에서도 즐겨썼다.[27] 그래서 그를 향한 존경이 담긴 별명 중 하나가 Der Kapitän(선장)
- 대단히 박학다식했고 정치, 경제, 국방 등 많은 분야에 탁월한 식견을 갖고 있었다. 최고 수준의 지식인인 데다가 언변까지 좋아서 그 어떤 상대와의 토론에서도 밀리지 않았으며, 예리한 논점, 세련된 단어선택과 정확한 발음으로도 호평을 받았다. 다만 심히 완벽주의적인 성격에 다소 오만한 면이 있어서 동료들을 편안하게 해주기보다는 긴장시키는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 젊었을 때는 미남에다 베스트 드레서로서도 명성을 떨쳤다. 꽃미남은 아니지만 지성이 느껴지는 훈남이었고, 그닥 비싼 옷을 입는 건 아니었는데도 특유의 아우라가 있어서 그런지 수트빨이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다만 상대적으로 단신이었다는게 아쉬운(?) 부분.
- 첫 부인 로키 슈미트와는 유년 시절부터 만난 첫 사랑이었다고 하는데, 1942년 결혼해서 2010년 사별했다.
- 그런데 2012년 어느 한 잡지에 따르면 22세 연하의 여성과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 엄청난 애연가였다. 인터뷰하는 동영상을 보면 흡연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었다. 독일 TV 프로그램에 출연할 때 버젓이 흡연을 해도 되는 거의 유일한 사람으로 통했다. 2008년에는 극장에서 아내와 함께 대놓고 담배를 피웠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독일 경찰이 슈미트가 십년 이상 공공장소에서 금연법을 어겼다는 혐의로 소환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총리 시절엔 영국의회에서 영어로 유려한 연설을 하여 여러 사람을 놀라게 했다.[28]
- 피아노 연주에도 상당한 재능이 있었고, 총리 퇴임 직후인 1982년에 국제사면위원회에 판매 수익금 일부를 기부한다는 조건으로 EMI에서 프로 피아니스트 크리스토프 에셴바흐, 유스투스 프란츠,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제7번과 제10번을 녹음해 음반으로 발매했다. 슈미트는 7번에서 제3피아노 파트를 맡아 연주했다. 1985년에는 도이체 그라모폰에서 역시 프로 피아니스트들인 에셴바흐, 프란츠, 게르하르트 오피츠가 함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바흐의 건반악기 다중 협주곡들을 녹음할 때 네 대의 건반악기를 위한 협주곡(BWV 1065)에서 특별 초빙되어 제4건반 파트를 맡았다.
- 일평생 오펠 자동차를 좋아했다고 한다. 총리 재임 시절에는 레코드를, 말년에는 카데트를 타고 다녔다.
- 그의 사후 고향인 함부르크에 위치한 함부르크 공항이 그의 사망 1주년을 추모하며 2016년 11월 10일부터 헬무트 슈미트 함부르크 공항(Hamburg Airport „Helmut Schmidt“)으로 명명되었다.
- 2018년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한 해 동안 독일에서 발행되는 2유로 주화의 도안으로 선정되었다.